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조선 후기 [[붕당]]인 [[노론]]이 조선 후기를 지배했고[* 사실 매체에서 묘사되는 노론 음모론은 주로 여기까지긴 하다. 뒤쪽은 사실 언급하기도 뭐한 주장인지라..], 심지어 지금도 어찌어찌 계보가 이어져 [[한국]]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다는 일종의 '''[[음모론]]'''. 비꼬는 의미에서 '''노론 [[프리메이슨|메이슨]]'''이라고도 부른다. [[노론]] 음모론자들은 [[유사역사학]]을 신봉하기 때문에 주류 [[역사학]]이 노론의 주도로 형성되고 조작되었다 하여 '노론 사관'이라고 명명한다. 음모론자들이 기존 역사학계의 사관을 폄칭하여 부르는 말이므로, 노론 음모론을 일컬어 '노론 사관'이라고 부르면 혼란이 올 수 있다. 정치 집단이자 유학의 학파였던 노론들이 독자적인 사관을 형성했다는 의견은 학계에도 있기는 하다. 그러나 노론 음모론의 문제는 노론 세력이 조선 후기에 군림함은 물론이요, 일제 시대에서도 친일파로 활약했고 [[대한민국]] 건국 이후에까지 살아남아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세력으로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. 이 같은 음모론을 앞장서서 대중화하고 퍼뜨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[[이덕일]]. 위에 나왔듯 역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관은 아니다. 실제로 노론이 정치적 우세를 점하고 소론과 남인을 조정에서 배제하자, 소론/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인식이 조선 말기에 퍼졌던 듯하다. 가령 [[고종(대한제국)|고종]] 시절 사람인 [[이건창]](李建昌)은 조선 붕당 정치사서 [[당의통략]](黨議通略)을 집필하며, 서인 공신 세력이 "국혼을 다른 세력에게 잃지 말고 재야의 지도자인 산림을 높여 쓰자."고 맹약했고,(일명 물실국혼(勿失國婚), 숭용산림(崇用山林)) "그 이후로도 기반을 잃지 않고 집권할 수 있었다."고 서술한 바 있다.[* 다만 국혼은 서인에게 흡수당하기 이전의 훈구파도 많이 치르던 것인데, 위 모토들 알고 보면 훈구파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서인 세력이 훈구파의 국혼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.] [[정조(조선)|정조]] 독살설도 남인 일가의 민담이나 [[여유당전서]] 등에도 나오며, 이를 근거로 남인 잔당이 반역을 꾀하기도 하였다. 하지만 이런 '썰'들이 (마치 [[오컬트]]에 나오는 [[프리메이슨]]이나 [[장미십자회]]처럼) 권력을 장악한 비밀 결사체라고 노론을 몰아붙이는 음모론으로 바뀐 것은 이덕일을 비롯한 현대 유사역사학이 그 기원이다. '노론사관'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[[이덕일]]이 쓴 『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(2009)』이다. [[http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6062981|#]]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도 『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(2011)』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.[[http://book.naver.com/bookdb/book_detail.nhn?bid=6743983|#]] 이덕일이 쓴 '''[[http://www.sisapress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62632|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의 당리당략]]'''이라는 글도 있으니 참조 바람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